[스크랩] (환경일반) 내일을 위협하는 환경호르몬
퀴즈 하나. 컵라면을 10분 내에 먹을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배고픈 정도에 따라 다를 텐데, 끓는 물을 부은 후 10분 만에 다 먹어치운다고 상품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환경호르몬 문제가 일본에 이어 우리 사회에 불거져 나왔을 때, 정부의 담당 공무원은 말했다. 10분 이내 먹으면 문제될 게 없다고. 그래서 실험해봤는데, 10분 내에 입천장을 데고 말았다. 환경호르몬은 뜨거운 물이 담긴 스티로폼 용기에서 10분 동안 기다렸다 나오는 것일까. 나오더라도 기준치 이하이므로 10분 이내면 괜찮을까. 그 여부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을 경험한 일본은 환경호르몬에 민감한데, 원진레이온 사건을 교훈으로 남기지 못한 우리는 환경호르몬이라 칭하는 내분비교란물질에 거의 무감각하다. 지금은 플라스틱에 밀려 자취를 감춘 스티로폼 컵라면 용기만이 아니다. 에폭시 코팅된 통조림과 비닐 코팅된 일회용 컵 역시 환경호르몬과 무관하지 않은데, 플라스틱 부엌 용기들이 재활용 쓰레기통에 갑자기 넘친다. 9월 중순에 방영한 서울방송 스페셜 이후 생긴 새삼스런 현상이다. 뜨거운 물이 담기는 플라스틱 용기는 컵라면과 반찬통에서 그치지 않는다. 식품매장 냉장고에 진열된 음료수 병은 차가운 상태로 내용물을 담았을까.
10분 내에 컵라면을 먹으면 문제없다던 공무원의 주장은 몸에 작용하는 호로문의 농도를 상정할 때 기각되지 않을 수 없다. 『도둑맞은 미래』의 저자들은 탱크로리 660대 분량의 토닉워터에 진 한 방울을 떨어뜨릴 때 발생하는 1조분의1 농도에 주목한다. 탱크로리 660대가 늘어서면 6마일에 이른단다. 탱크로리 1000대 분량의 용액에 섞인 35방울 정도의 에스트로겐 농도 차이가 여성다움을 좌우한다는데, 10분 동안 배출되는 컵라면의 환경호르몬은 괜찮다니, 그 무모함에 놀랄 뿐이다. 그 공무원은 누구의 자료를 참고했을까. 시민의 처지로 문제에 접근해야 할 공무원은 왜 기업 창고에 쌓인 스티로폼 용기의 재고를 고민하는 태도를 연출했을까.
정상 호르몬과 유사한 분자구조를 가진 환경호르몬은 체내에서 내분비를 교란한다.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그 폐해가 밝혀졌지만, 서울방송 스페셜은 플라스틱이 얼마다 위험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기를 낳기는커녕 성관계도 없는 여학생에게 닥치는 자궁내막증 공포와 터무니없는 성조숙증, 남자아기의 성기가 여아처럼 내려간 요도하열증은 일부 극단적인 예가 아니다. 최근 발생 건수가 급증한다는 사실은 내일을 걱정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겉보기 건강한 내 아이가 결혼해 낳을 후대를 아무도 안심할 수 없다.
방송 여파는 경쟁 기업 사이의 비방 광고에 이어 법정소송으로 연결되었다는데, 정작 문제를 부각한 서울방송국을 고발한 기업이나 전문가는 없다. 모순 아닌가. 일부 사례를 일반화했다고 폄하한 일부 전문가의 냉소가 잠시 있었지만 요즘은 조용하다. 벌떼처럼 일어나 방송 내용을 과학적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민감한 체질의 극단 사례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이들이 조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플라스틱 주방 용기를 죄 내버리는 민심이 냄비처럼 식기 기다리는 것일까.
1962년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은 재발된 유방암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거대 농약회사의 전문가와 텔레비전 공개 토론회를 가졌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상은 해충과 질병에 장악될 것으로 경력 화려한 전문가들은 으름장 놓았지만 진실을 담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겸손한 레이첼 카슨의 진정성 있는 자세는 천만 명이 넘는 시청자를 감동시키며 농약의 위험성을 세인들에 각인시켰다.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는 전문가들의 한계였다. 책임회피로 일관한 기업 전문가와 달리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실증적으로 파악한 시민과학자의 당연한 승리였다.
대개의 환경호르몬은 당시의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개발한 유기화학물질이다. 미국만 해도 2천 여 유기화학물질이 해마다 개발되지만, 안전성은 개별 제품에 한해 추론하는 게 고작이다. 기준치를 운운하지만 다른 화합물과 만날 때 위험성이 어떻게 상승하는지 알지 못한다. 동물실험으로 추론한 기준치를 사람에 적용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치더라도, 경제 사정에 따라 오르내리는 기준치를 어찌 믿을 수 있나. 요란한 광고에 속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세제, 방향제, 살충제는 안전할까. 불특정다수에서 발생하는 아토피, 자궁내막증, 이차성징의 혼란과 같은 징후는 내일을 암울하게 예고하는데, 규명하기 어려운 인과관계는 환경호르몬에 면죄부를 제공하니 더욱 불안하다.
환경호르몬은 플라스틱 용기에 그치지 않는다. 농약에 오염된 관행 농산물과 우리 식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입 농산물도 걱정거리이고 쓰레기소각로에서 주로 발생하는 다이옥신에 의한 공포도 무시하지 못한다. 생태계의 순환을 저해할 정도로 돈과 편의를 좇는 낭비적인 삶이 화근이다. 초여름에 흐트러지는 장미를 춘화처리하면 한해 6번 꽃을 피워내지만 나무는 금방 죽어버린다. 식물 성장호르몬인 지베렐린을 어린 과수에 바르면 사과와 배는 가지마다 주렁주렁 거대한 과실을 제철보다 먼저 매달지만 나무는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죽은 나무를 교체하면 그만이라고 믿는 농부는 농약중독에 허덕이고, 장미를 한 다발 주고받으며 철모르는 과일로 배불리는 사람은 제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강요하는데, 내일은 온전할 수 있을까.
농약으로 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을 예고한 레이첼 카슨의 경고를 주의 깊게 들은 미국은 새 소리와 함께 봄이 열린다고, 미국의 언론은 레이첼 카슨 서거 30주년을 기렸다. 이후 농약회사는 망했던가. 『침묵의 봄』이 출간된 지 40년이 넘은 요즘, 다국적기업으로 변신한 농약회사의 매출은 50만 배나 늘었다. 그러자 OECD 평균 6배의 농약을 살포하는 우리네 농촌의 봄은 고요하다. 새나 개구리는 물론, 아기의 울음소리도 멈춘 지 오래다. 대신 환경호르몬 이상 늘어난 자동차와 광고 소음으로 주위는 시끄럽고, 생태계가 교란되는 만큼 쓰레기는 도처에 넘친다. 식민지와 노예 착취 덕분에 성장한 산업사회는 자신의 관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후손의 마지막 기반마저 허물려 든다.
칠흑 같은 밤, 타이타닉 호는 빙산을 향하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막 건조한 철선의 우수성을 과신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너질 징후가 보이는 삼풍백화점에서 대피방송을 미루다 참변을 자초한 사장처럼, 일등석 승객들의 소비행각을 연장하려다 난파되고 말았을지 모른다. 고객들이 붕괴 징후를 깨닫기 전에 백화점을 잽싸게 빠져나간 사장과 일부 간부사원처럼, 타이타닉 호의 구명선을 선점한 인원은 극소수였다. 마찬가지다. 환경호르몬에 의한 문제를 최신 의약품으로 해결할 수 없다. 더 획기적인 과학기술이 안전한 플라스틱을 다시 개발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이지 않다.
코앞에 있는 환경호르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입천장이 데일지라도, ‘컵라면을 10분 내에 먹으면 괜찮다’고 발표한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은근히 자본을 편드는 정부에 의탁할 때 문제는 꼬이기 마련이다. 소비자가 운동으로 나서야 한다. 불매운동과 같은 적극적 행동으로 자본을 굴복시키고, 제도를 바꾸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 하겠지만, 소비자가 안전한 농산물을 직접 재배하거나 구입하여 직접 조리해서 먹는 이른바 ‘슬로우 푸드 운동’이 바람직하다. 방향제나 살충제보다 집안을 청결히 유지하고, 쓰레기 발생을 줄이는 소비생활이 환경호르몬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도둑맞은 미래』의 저자 테오 콜번은 지금은 저녁 11시 55분이라고 말한다. 이대로 5분이 지나면 인류는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경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이는 환경호르몬의 징후를 더는 무시하지 말자고 당부한다. 그러자면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일찍이 노자가 강조했듯, 기계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잉태한 생태계와 어울리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난파 직전의 배에서 내리길 두려워 말자”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설복에 귀 기울일 필요가 절박한 시점이다. (경희대학원 대학원보, 2006.10.30, 147호)